예나 헤이트 로드리고, 케이팝의 안이한 시선
추세를 관찰했을 뿐 이에 관한 연구는 없었다.
6월 27일 공개된 아이즈원 출신 솔로 가수 예나의 신곡 'Hate Rodrigo' 뮤직비디오가 공개 3일 만인 30일 유튜브에서 비공개로 전환됐다. 두 번째 정규 앨범 발매를 앞둔 데다 오늘 새 싱글 'Vampire'까지 발표하는 로드리고 입장에서 소셜 미디어가 'HateRodrigo' 해시태그로 넘치는 모습은 용납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2021년 팝 시장을 정복한 올리비아 로드리고를 기억한다면 예나의 새 노래를 듣지 않고도 어떤 콘셉트인지 감이 올 것이다. 팬데믹 시기부터 본격 등장한 Y2K 리바이벌 미감에 팝 펑크 록과 이모코어, 소셜 미디어 이야기다. 사실 올리비아 로드리고의 SOUR에서 록 장르 곡은 'Brutal'과 'good 4 u' 정도가 전부고, 나머지 곡은 'drivers license'처럼 잔잔한 피아노 발라드나 베드룹 팝이 주를 이루는데도 한국에서는 이 Z세대 유행을 하이틴에 뭉뚱그려 넣는다. 틱톡에서 범람한 지 오래됐으며 한국에서도 심심찮게 레퍼런스를 발견할 수 있는 소재다.
역시 노래는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올리비아 로드리고의 'deja vu' 뮤직비디오 패션에 옥탑방 2000년대 하이틴 영화 속 세트를 지어놓고, 'good 4 u'의 팝 펑크 록을 적당히 버무렸다. 공식 인스타그램에 로드리고를 태그하고 로드리고의 앨범을 뮤직비디오 소품으로 사용하는 등 조심성도 없었다. 출처를 밝혔으니 마음대로 가져와도 된다고 생각한 걸까. 앨범기획사의 책임으로만 보기도 어려운 것이, 작사 작곡에 예나가 참여했고 'Hate'라는 단어를 반어적으로 사용했다는 설명까지 내놓은 상황이다. 저작권 문제가 터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Hate Rodrigo'는 최근 케이팝 기획에서 자주 목격되는 안이한 레퍼런스 활용의 가장 좋지 못한 사례로 남게 됐다. 로드리고를 소환했으나 그가 어떻게 틴에이저들의 충성을 끌어냈고 Y2K 유행을 영리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10대의 우울과 분노를 걸러낸 후 예쁘고 감각적인 이미지 재현에만 힘썼다. 겪지 못한 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연기하는 과정에서 세계적인 스타를 직접 언급하니 부조화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추세를 관찰했을 뿐 이에 관한 연구는 없었다.
혹자는 이런 해석 및 적용 과정이 케이팝의 오래된 작동 방식이며 오히려 그렇기에 케이팝이 매력적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팝과 국내 음악에 위계를 매긴다는 의견도 보인다. 예나의 솔로 경력을 예시로 들어 표절을 피하고 아티스트 지향을 담은 선택이라는 옹호도 있다. 모두 동의하지 않는다.
2023년 케이팝이 저지 클럽(Jersey Club) 장르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살펴보자. 먼저 이 장르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뉴진스의 겨울 스페셜 싱글 'Ditto'다. 프로듀서 250은 '뽕' 앨범을 만드는 과정에서 '슬프지만 춤을 추어야 하는' 볼티모어 댄스 클럽 음악에 관한 관심과 연구를 지속해 왔고, 고교 시절의 추억처럼 언젠가 대중의 기억 속에서 잊히게 될 아이돌 그룹의 아련한 약속에 장르를 도입했다. 저지 클럽에 가까운 스타일이었음에도 어도어 레이블이 이 곡을 볼티모어 댄스 클럽이라 소개한 이유가 있다.
이와 정확히 반대에 있는 곡은 뉴진스와 같은 하이브 소속 걸그룹 르세라핌의 작품이다.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에서 저지 클럽은 장르의 역사나 도시의 역사, 애환 등 정서적인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 공격적이고 빠른 템포 위에 빈틈없이 도전적인 구호를 빼곡히 채워 넣기 위한 팔레트의 역할을 한다. 표현의 깊이는 얕고 챌린지를 유도하는 안무에 상당한 무게추가 기울어져 있다. 장르의 세련된 개성을 파악하여 슬픔과 우울의 감정을 덜어내고 강한 자의식을 탑재하여 케이팝으로 재가공한 곡이다.
'Ditto'와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의 방향은 다르다. 전자는 힙합,일렉트로닉에 능통한 프로듀서가 기획자의 의도 정서에 부합하는 장르를 부드럽게 가공하여 제공한 곡이다. 후자는 장르의 역동적인 리듬이라는 형식에 온전히 집중해 그룹의 주제 의식을 강화하고 퍼포먼스에 힘을 쏟은 노래다.
지향하는 바가 다르니 결과가 달라졌을 뿐, 두 곡에서 저지 클럽의 유행과 확산하는 양상을 꾸준히 관찰하고 이를 재해석하려는 기획 단계에서의 노력을 공통으로 감지할 수 있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둘 중 어느 곳에서 아이디어를 얻느냐는 상관이 없다. 입출력 과정에서 새로운 시각과 흥미롭고 과감한 도전을 통해 독특한 결과물을 내놓는지가 중요하다. 과연 케이팝의 수작 중 이런 고민 없이 불쑥 튀어나온 곡의 비중은 얼마나 될까?
레퍼런스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세상에 과거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된 새로운 창작물은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노골적인 참조와 무분별한 수용이 케이팝의 미덕이라는 주장은 케이팝의 가치를 굉장히 낮게 바라보고 있다는 자기 고백과 마찬가지다. 오히려 그런 해석이야말로 팝과 케이팝의 권력 구도를 공고히 한다. 'Hate'를 선망의 뜻으로 활용했다는 예나의 고백에서 어떤 주체성을 발견할 수 있는가.
심지어 예나도 이번 곡 전까지 지난해 데뷔곡 'Smiley'와 'Smartphone'으로 본인의 개성에 맞는 곡을 선보였다. 해맑은 이미지 강점을 바탕으로 Y2K, 하이틴 트렌드를 가져와 통통 튀는 디지털 시대 케이팝 아티스트의 초연결 자아, 슈퍼히어로 서사를 만들었다. 노래도 준수했고 반응도 좋았다. 성공적인 경력 연결을 위해 내놓은 노래가 'Hate Rodrigo'라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팝 펑크를 활용한 케이팝 가수들의 다른 해석 사례도 분명히 존재한다. 'TOMBOY'로 록 유행을 전면 도입한 (여자)아이들은 'Allergy'와 'Queencard'로 공허한 셀러브리티들의 삶을 꼬집어 케이팝 걸그룹 버전의 하이틴을 선보였다. 예나와 같은 위에화 소속이었던 우즈(WOODZ)는 팝 펑크 곡 '난 너 없이' 이후 올해 EDAM으로 이적하여 음울한 주제의 록 후속작 'Drowning'으로 혼란스러운 청춘 성장 서사에 힘을 실었다.
올리비아 로드리고의 노래 중 가장 좋아하는 곡은 'Jealousy Jealousy'다. 나보다 대단하고 완벽해 보이는 이들을 향해 질투심을 숨기지 않는 로드리고의 복잡한 10대 감정이 무질서한 피아노 연주를 타고 퍼져나가 또래 사춘기 청소년들의 공감을 획득했다. 그의 시선도, 그의 노래도, 그저 유행하니까 쉽게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빽빽한 컴백 스케줄과 새로움에 대한 강박 가운데 날카로웠던 케이팝 기획의 촉과 날은 점점 무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