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은 정말 위기일까?
6개월. 2023년 힙합이 빌보드 주요 차트 정상에 이름을 올리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7월 10일 릴 우지 버트의 ‘Pink Tape’가 비로소 빌보드 200 1위를 기록하며 갈증을 풀어줬다. 올해는 30년 전 1993년 사이프러스 힐의 ‘Black Sunday’ 이후 가장 오랫동안 랩/힙합 앨범이 1위에 오르지 못한 해다.
싱글 부문은 상황이 더 나쁘다. HOT 100 1위 곡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음악의 성격과 장르를 떠나 음악가로 범위를 넓히면 지난주 빌보드 HOT 100 1위 곡 정국의 ‘Seven’에 참여한 라토를 주인공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례적인 현상이다. 지난해 상반기에는 이렇지 않았다. 거너, 릴 더크,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 푸샤 티, 퓨처, 켄드릭 라마가 1위 앨범을 내놓았다. 해리 스타일스가 ‘As It Was’로 장기 집권하던 HOT 100에서도 잭 할로우, 퓨처&드레이크의 넘버원이 있었다. 올해는 빌보드 1위곡은 고사하고 톱텐 히트곡도 여덟 곡밖에 없다. 빌보드 차트의 영향력이 나날이 감소하고 있다지만, 힙합 진영에 결코 기분 좋은 소식은 아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여러 매체를 통해 힙합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미국 내 스트리밍 시장 점유율이 줄었다. 루미네이트 통계에 의하면 미국 내 힙합의 스트리밍 비중은 3년 연속 하락세를 기록하며 25.9%를 차지하고 있다. 컨트리와 라틴 음악, 케이팝의 점유율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주도권을 잃어가고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6월까지 빌보드 지는 힙합이 올해 단 한 곡, 단 한 장의 넘버원을 내놓지 못할 것이라 경고했다. 릴 우지 버트와 트래비스 스콧의 활약으로 상황이 달라졌지만, 만족스러운 성과는 아니다.
힙합은 정말 위기일까? 지표상으로 주춤하고 있는 건 맞다. 그렇다고 당장 망한다거나, 힙합의 시대가 끝났다는 둥 자극적인 주장은 대부분 호들갑이다. 그 논리라면 전체 청취율의 13.3%밖에 차지하지 않는 팝 시장은 이미 고사하여야 했다. 하락세에도 불구하고 힙합은 여전히 미국에서 가장 많이 스트리밍되는 장르이며 그 영향력은 현대 음악 장르에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래퍼가 1위를 차지하지 못했다고 힙합의 시대가 지난 것은 아니다.
올해 빌보드 차트를 정복한 컨트리 가수 모건 월렌이 좋은 예다. 모건 월렌과 호전적인 친구들의 브로 컨트리(Bro-Country)의 상당 부분이 힙합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그의 음악은 자랑스러운 동네 이웃, 음주와 파티, 스포츠와 사랑을 주제로 삼는다.‘ 블록버스터 히트 앨범 ‘One Thing At A Time’은 힙합 비트의 적극적인 차용과 더불어 3분 이내의 노래를 36곡이나 수록하며 힙합 슈퍼스타들이 높은 스트리밍 점유율을 위해 개척한 전략을 그대로 가져왔다. 모건 월렌은 힙합의 문법을 컨트리에 적용해 성공했다.
2023년의 시작을 선언한 앨범 ‘SOS’로 빌보드 200에서 5주 연속 1위를 차지한 SZA가 힙합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 500만 장 이상 판매고를 기록하고 세 앨범을 연속으로 빌보드 200 차트 정상에 올려놓은 스트레이키즈는 연습생 방찬이 멤버 구성과 자체 프로듀싱 팀을 꾸려 힙합 중심의 음악을 펼치는 그룹이다.
힙합의 빌보드 성적 부진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다. 트래비스 스콧 전까지 슈퍼스타라 불릴 만한 아티스트의 컴백 소식이 없었다. 텐타시온과 주스 월드 등 젊은 재능들부터 닙시 허슬, 미고스의 테이크오프 등이 인기의 절정을 만끽하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메간 더 스탤리언과 영 떡, 릴 티제이 등은 음악 외적인 사건사고와 재판으로 활동을 중단했다. 시장을 호령하던 카니예 웨스트는 기행과 함께 스스로 침체기를 자초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원인은 힙합이 더 이상 빌보드로 대표되는 표면적인 상업적 성과를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며 관성을 벗어나 실험적인 음악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카니예 웨스트, 드레이크, 퓨처, 트래비스 스콧부터 다양한 힙합 스타들이 힙합의 문법에서 벗어나 대규모 자본을 투입해 더 좋은 소리, 더 거대한 구성, 더 난해한 메시지를 실험하고 있다.
대표적인 아티스트가 릴 야티와 트래비스 스콧이다. 릴 야티의 ‘Let’s Start Here’ 앨범은 7분에 달하는 첫곡부터 57분 동안 이어지는 사이키델릭 록 앨범이다. 어떤 곡은 AOR이며 어떤 곡은 슈게이징이기도 하다. 소닉 랜치, 일렉트릭 레이디 등 쟁쟁한 스튜디오 일곱 곳을 거쳐 제이크 포트레이트, 잼 시티, 저스틴 레이슨, 막달레나 베이, 패트릭 윔벌리 등 실력 있는 프로듀서들과 함께 독특한 새 시대의 록을 만들어냈다.
트래비스 스콧의 ‘UTOPIA’는 한술 더 뜬다. 이 앨범은 드레이크, 위켄드, 비욘세, 배드 버니 등 슈퍼스타들의 참여와 더불어 프로듀서진에는 메트로 부민, 원다걸, 카니예 웨스트, 퍼렐 윌리엄스와 다프트 펑크의 기 마누엘 드 오망 크리스토 등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트래비스 스콧은 기라성같은 음악인들을 모아 자신의 세계를 건설하는 팝스타의 자질을 발휘했다. 상업적으로도 성공했다. 빌보드 200 1위는 물론, 앨범 수록곡 19곡을 모두 빌보드 핫 100 차트에 올렸다.
마이크 딘의 홈 스튜디오에서 녹음했던 전작 ‘ASTROWORLD’와 달리 ‘UTOPIA’는 애비 로드, 미라발, 샹그리라 스튜디오에서 작업했다. 앨범을 듣고 있노라면 프로덕션 밸류와 A&R로는 현시대의 최첨단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코로나 19 팬데믹 이후 대세가 된 댄스플로어 바이브를 이어가는 시도도 등장한다. 비욘세의 ‘Renaissance’는 1980년대 시카고와 뉴욕부터 현대 언더그라운드까지의 전자 예술가들을 총동원한 대중음악의 시스티나 성당이었다. 드레이크의 ‘Honestly, Nevermind’ 역시 하우스를 기반으로 한 댄스 앨범이었으며 그 중심에는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볼티모어 클럽 장르가 있었다. 2023년 힙합에 빌보드 200 첫 1위 앨범을 안긴 릴 우지 버트가 힙합, 팝, 댄스, 록을 어지럽게 혼합한 앨범 ‘Pink Tape’ 가운데 저지 클럽 스타일의 ‘Just Wanna Rock’을 메인 싱글로 앞세우고 있음을 기억하자.
릴 야티와 트래비스 스콧의 현재 이 흐름이 사이키델릭 록, 프로그레시브 록의 예술적 시도와 겹쳐 보이는 가운데 반대 세력도 있다. 그와 반대에 섰던 개러지와 펑크 록, 팝 메탈의 시대를 종식하고 얼터너티브의 시대를 열었던 역사의 후계자들이다. 사실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하드코어 세력과 유사한 흐름이 힙합에 준동하기 시작한 것은 2010년대 중후반부터였다. 릴 야티, 릴 우지 버트, 치프 키프, 영 떡, 스모크퍼프, XXX텐타시온 등이 그 시대에 탄생한 스타들이다.
최근 주목할만한 반란을 이끄는 음악가는 제이펙마피아(JPEGMAFIA)다. 엠아이에이(M.I.A.)가 예언한 디지털 세계에서 암약하던 익스페리멘탈 래퍼들과 볼티모어의 오프라인 클럽 신 두 곳에 발을 딛고 있던 그는 혁신적인 음악을 선보이며 힙합의 문법을 해체하고 있다. 제이펙은 인터뷰를 통해 누구도 자신의 음악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스스로 작사, 작곡, 프로듀싱 모두를 해내야 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는 오늘날 독창적인 네 장의 정규 앨범을 내놓았고, 래퍼 대니 브라운과 함께 유력한 2023년의 앨범 후보 ‘Scaring the Hoes’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처럼 힙합은 전에 없던 과감한 형태로 예술성을 꽃피우고 있다. 2010년대 중후반 힙합에 눌려있던 다른 장르들이 힙합의 영향을 받아들여 성장하는 가운데 힙합은 더욱 엄격한 기준을 세워 도전하고, 그 아래의 저항 세력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는 단계를 맞이하고 있다. 언더그라운드 신을 차치하고서라도 2020년대 여성 래퍼들의 활약만으로도 힙합의 틈새시장 공략과 새로운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모든 결과물이 우수하지는 않고, 모든 실험이 성공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위기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장르의 존속을 흔드는 주장에 힘을 싣고 수치에 크게 신경 쓰는 이들은 다음 중 속할 가능성이 높다. 음악 업계 관계자들과 경쟁 장르 종사자들, 그리고 힙합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