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일리 사이러스가 'Flowers'로 피운 꽃
마일리 사이러스의 싱글 'Flowers'가 빌보드 HOT 100 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17년 동안 활동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빌보드 싱글 차트 핫샷 데뷔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평범한 성적도 아니다. 싱글 발매 첫 주 8,600만 스트리밍으로 스포티파이 역대 기록을 깨며 1위에 올랐다.
돌아보니 'Wrecking Ball'과 'We Can’t Stop'이 수록된 'Bangerz' 앨범 이후 마일리는 이렇다 할 히트곡이 없었다. 17년 커리어에 HOT 100 1위 곡이 'Wrecking Ball' 하나였다. 아티스트에게도 뜻깊은 성과다.
'Flowers'는 어떻게 마일리에게 영광을 안겨주었을까. 우선 해리 스타일스의 'Harry’s House' 앨범을 성공으로 이끈 키드 하푼과 타일러 존슨 듀오의 건조한 디스코 소울 곡이 매력 있다. 신곡 가뭄의 1월에 발표했으니 시기도 좋았다.
하지만 나는 뻔하고 재미없는 이유를 핵심 원인으로 본다. 마일리 사이러스는 치열한 과정을 거쳐 창작의 자기 주도권을 확립했고, 이를 바탕으로 현재 자신이 느끼는 진실한 감정을 노래로 만들었기에 성공했다. 시사하는 바가 있다.
2013년으로 돌아가 보자. 꿈 많은 디즈니 스타 한나 몬타나는 어른이 되기 위해 모든 고정관념과 예측을 집어던졌다. 대중이 바라는 최소한의 모든 것조차도 다 집어던진 마일리 사이러스는 짧게 머리를 치고, 쾌락과 환락의 파티 아이콘이자 신세대의 섹스 심벌이 되고자 했다. 전라로 공을 타고, VMA 시상식에선 로빈 시크와 함께 생방송을 폭파해 버렸으며, 악명 높은 'Bangerz Tour'를 벌이며 매일매일 가십난을 장식했다.
보수적인 부모 세대의 비판과 황색 언론의 집요한 추적은 20대 초중반 가수가 감당하기에 절대 쉽지 않았다. 이후 마일리 사이러스는 편안한 컨트리 스타인 아버지 빌리 레이 사이러스를 따라 다시금 착한 테네시 걸 이미지를 갖추고, 리암 헴스워스와 흠뻑 사랑에 빠져 러브송 ‘Malibu’를 발표했다. 컨트리 색이 짙었던 'Younger Now', 1980년대 록스타 재현 선언 'Midnight Sky'까지 최근 마일리의 행보는 미국 대중음악의 역사를 계승하는 레트로걸이었다.
쉽게 말해 자기 노래가 아니라 남의 노래를 부르고 있던 셈이다. 그 과정에서 기대한 만큼의 상업적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돈 주고 살 수 없는 전설들의 인정을 받았다. 그가 지난해 NBC의 새해 전야 콘서트의 주인공이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마일리스 뉴 이어스 이브 파티(Miley's New Year's Eve Party)에는 돌리 파튼과 데이빗 번이 등장했고, 라토와 시아, 패리스 힐튼(!)이 무대를 장식했다. 조안 제트와 슈퍼볼 프리쇼 무대에 서고 글래스톤베리에서 레드 제플린 노래를 커버한다. 아버지가 워낙 슈퍼스타였으니 당연한 후광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마일리 사이러스가 보여준 노력의 정도는 남달랐다.
그 긴 과정을 통해 마일리 사이러스는 디즈니 스타를 넘어 싱어송라이터로 거듭날 수 있었다. 한나 몬타나의 국민 여동생 이미지는 많이 희석되었을지언정 현재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가수로서 오히려 위상을 공고히 한 것이다. 놀랍게도 'Flowers' 이전, 그리고 이후의 성공과 99% 유사한 행보를 먼저 걸어간 후배가 있다. 2021년 음악 시장을 송두리째 뒤흔든 올리비아 로드리고다.
마일리처럼 디즈니 스타로 경력을 시작한 올리비아 로드리고가 'drivers license'를 발표한 때는 정확히 2년 전 2021년의 1월이었다. 차분한 발라드 곡이었지만 노래 가사는 살벌했다. 운전면허를 따고 행복한 드라이브를 약속한 연인의 바람 행각과 이별 통보에 절망한 틴에이지 소녀의 절규였다. ‘하이 스쿨 뮤지컬’에 함께 출연했던 조슈아 바셋을 저격한 곡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의 새 여자친구 사브리나 카펜터도 이야기의 중심에 섰다.
당시 Z세대들은 틱톡과 유튜브에서 'drivers license' 삼각관계를 토론하느라 밤을 꼬박 새웠다. 올리비아의 입장, 사브리나의 입장, 조슈아의 입장에 이입하여 노래 가사를 바꿔 부르는 챌린지가 대대적으로 유행했다. 심지어 운전면허증의 입장으로 노래를 만들어 히트시킨 크리에이터도 있었다.
일각에서는 올리비아 로드리고가 전 연인을 노래의 소재로 사용한다는 비판을 제기했지만, 논란 대신 커다란 호응이 뒤따랐다. 올리비아 로드리고 또래들이 일상에서 한 번쯤 겪을 법한 이야기였고, 그 시기에만 격하게 토로할 수 있는 날 선 메시지를 향한 공감의 크기가 너무 거대했던 덕이다.
'Flowers'는 'drivers license'의 어른 버전이다. 2019년 결혼 후 8개월 만에 이혼한 리암 헴스워스를 향한 저격이라는 사실을 딱히 숨기지 않는다. Flowers가 발매된 1월 13일은 리암 헴스워스의 생일이다. 노래의 후렴은 둘의 결혼식장에서 울려 퍼졌던 브루노 마스의 ‘When I Was Your Man’을 비틀었다. 잔인한 이별 후 자신의 실수를 돌아보며 후회하는 슬픈 원곡의 가사를 바꿔 자기애 가득한 선언을 완성했다.
'네게 꽃을 사다 줄 걸 그랬어.' - 'When I Was Your Man'
'난 혼자 꽃을 살 수 있어' - 'Flowers'
'널 파티에 데려가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춤을 출걸'
'난 혼자서 춤을 출 수도, 내 손을 내가 잡아줄 수도 있어'
올리비아 로드리고처럼 마일리 사이러스도 틱톡에서 화제의 중심에 섰다. 뮤직비디오는 리암 헴스워스가 14명 이상의 여성과 바람을 피웠다고 의심되는 저택을 배경으로 하며, 마일리 사이러스가 입고 나온 슈트는 리암이 어벤저스 시사회에서 입었던 옷이라는 이야기가 널리 퍼진다.
가십을 활용해 노래를 바이럴 시켰다는 뜻이 아니다. 올리비아 로드리고처럼 마일리 사이러스도 본인의 경험을 창작물로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개인의 내밀한 감정과 사소한 오브제 하나까지 모두 내놓으며 공감의 폭을 넓혔기에 성공했다는 뜻이다. 오래 쌓은 음악 내공을 바탕으로 만듦새도 근사해지자 빌보드 넘버원 싱글이 탄생했다. 마일리 사이러스의 음악 경력에 또 다른 하이라이트가 기록되는 순간이다.
최근 내가 쓰는 글과 말하는 내용의 결론은 모두 하나로 통한다. 꾸며낸 이야기 대신 서툴더라도 지금 당장 본인이 느끼는 감정을 진솔히 표현하라는 조언이다. 아티스트들에게 조언할 기회가 와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잘하는 사람은 많고 특별한 재능도 흔하지만,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이 시간대의 당신이 느끼는 감정과 이야기는 오직 그 순간에만 내놓을 수 있어 소중하다. 창작가의 고백에 공명한 이들은 충성스러운 지지자가 된다. 그들의 수가 차츰 늘어나며,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기적 같은 순간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게 된다.
이미 우리는 케이팝 시장에서 자기 주도적 창작의 위력을 확인했다. 방탄소년단은 투박한 사회 비판과 학창 시절로부터 출발해 'Love Yourself'라는 거대 이데올로기로 세계를 정복했다. 세븐틴과 스트레이키즈 등 셀프 프로듀싱할 수 있는 보이그룹들은 개성 있는 스타일과 진솔한 노랫말을 통해 스트리밍 음원 차트 히트곡 없이도 막강한 팬덤을 거느리며 그들과 깊은 정신적 유대를 나누고 세계 시장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다.
마일리 사이러스가 피워낸 히트곡 'Flowers'의 성공이 많은 창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용기 있게 꺼내놓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기획의 입장에서도 담당하는 아티스트의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검토해야 할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