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결산] 올해의 가요 앨범 15장
팬데믹의 공포가 잦아든 2022년이었지만 우리 음악은 코로나19 대유행 이전의 활력을 되찾지 못했다.
진공의 시간으로부터 빚어진 결과물은 깊이를 상실했고 에너지를 잃었다. 과감한 시도보다 안전한 레퍼런스가 대거 등장했다. 내면의 이야기, 개인의 심경은 부족한 창작에 대한 비판을 막는 방패로 기능했다.
역행하는 시대를 바라보는 대신 달관을, 연결과 소통의 제안 대신 홀로 있기를 선택했다. 일단 뛰어놀자는 음악은 노골적인 흉내와 과거의 유산 벤치마킹에 머물렀다. 해외 트렌드를 영민하게 소화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이들은 케이팝 신의 젊은 창작가들이었다.
올해 우리 음악계는 꿈틀거리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활력에 미진했다. 그렇지만 기억해둘 작품과 노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글의 순서와 순위는 무관하다.
글렌체크 ‘Bleach’
전 세계 90년대생들이 창고 구석에 처박혀있던 기타를 꺼내들던 팬데믹 시기, 데뷔 10주년을 훌쩍 넘긴 듀오 글렌체크도 예외가 아니었다. 재기발랄하고 기억에 오래 남는 곡들로 가득한 세 번째 정규 앨범 ‘Bleach’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앞둔 사회의 어스름한 희망을 대변했다. 21세기 슬래커의 1990년대 찬양가 ‘Dazed & Confused’와 ‘Dive Baby Dive’, 감각적인 일렉트로 팝 ‘Sins’ 등 입체적이고 즐길 거리가 많은 작품이다.
250 ‘뽕’
베일에 싸인 프로듀서 250은 올해 오래도록 소문만 무성하던 ‘뽕’ 프로젝트를 완성하며 대중음악계에 신선한(?) 뽕짝 가락을 소개했다. 한국인의 DNA에 각인된 뽕의 정서를 깊이 탐구해 한국적인 사운드 소스와 해외 언더그라운드 로컬 음악 신의 감성을 결합했다. 김수일, 이정식, 이박사, 양인자, 나운도 등 베테랑의 이름도 눈에 띄었다. 열정 가득했던 과거를 울적하게 회상하며 바삐 몸을 움직이는 ‘뽕’은 우울한 시대 정서와도 잘 맞아떨어졌다. 250은 상반기 ‘뽕’, 하반기 뉴진스 ‘Attention’으로 2022년 대중음악계를 지배했다.
허클베리핀 ‘The Light of Rain’
허클베리핀의 일곱 번째 정규 앨범 ‘The Light of Rain’은 확실한 비전과 녹슬지 않는 송라이팅 능력을 갖춘 베테랑 밴드의 수작이다. 위로와 극복, 그리움의 정서가 입체적인 스펙트럼을 자랑하는 기타 팝 위에서 몽환과 환상의 풍경을 그린다. 이기용의 기타 리프와 멜로디는 촘촘하고 세밀하며 이소영의 처연한 보컬은 나이 들지 않았다. 기본에 충실하기에 아름다운 작품이 등장한다.
이현준 ‘번역 중 손실’
XXX 이후 가장 인상적인 한국 익스페리멘탈 힙합 앨범이다. 2019년 VMC의 보일링 프로젝트로 첫 정규앨범 ‘Main Stream’을 발표하며 남다른 시각을 과시한 이현준은 두 번째 앨범 ‘번역 중 손실’을 통해 설득력 있는 서사와 효과적인 장치, 탄탄하고 창의적인 퍼포먼스를 통해 본질에 이르는 구도의 길을 펼쳐 보인다. 소피(SOPHIE)의 음악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구현한 가상의 미래 세계는 피상적 소통과 기계적 번역이 범람하는 곳이다. 2022년의 우리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짱유, 제이플로우 & 힙노시스 테라피 ‘Hypnosis Therapy’
와비사비룸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했던 짱유와 제이플로우는 새로운 듀오 힙노시스 테라피를 결성하여 팬데믹 이후 광란에 몸을 맡길 수 있는 레이브 파티 음반을 내놓았다. 유기적으로 연결된 10곡의 테크노 비트 셋 위의 짱유는 절대 숨을 고르거나 주저하지 않는다. 속도제한, 억압, 제한 등 세상의 모든 지적에 중지를 치켜들고 고속도로 위를 질주하는 앨범 ‘Hypnosis Therapy’는 2022년 가장 통쾌하고 피에 굶주린 반항의 작품이다.
이찬혁 ‘ERROR’
오래전부터 죽음을 상상하며 창작의 고삐를 죄던 (‘물 만난 물고기’) AKMU(악동뮤지션) 이찬혁. 올해 그는 횡단보도 위 자신을 차로 들이받아버린 콘셉트 앨범 ‘ERROR’를 통해 확실한 자기 파괴를 이룩했다. 세간의 수군거림부터 하늘나라로 떠나는 장례식 현장의 재현까지 완벽한 서사를 갖춘 ‘ERROR’는 이찬혁의 검증된 음악 작가로의 역량과 독특한 비주얼 요소가 더해져 재미있는 팝 앨범으로 완성되었다. 앨범은 ‘그만하면 됐다’라 머무르기를 원하는 세상을 향한 반항이자 많은 것을 이룬 청년이 치열하게 스스로를 가다듬는 경쟁의식의 발로다.
넉살, 까데호 ‘당신께’
2020년 ‘1Q87’ 앨범부터 교류를 이어온 래퍼 넉살과 까데호는 올해 감각적인 아홉 곡의 합작품 ‘당신께’로 서로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펑크(Funk), 알앤비, 재즈, 소울을 폭넓게 아우르는 까데호의 자유분방한 연주 위 넉살은 다채로운 자아의 경계선에서 느낀 감정의 파노라마를 랩으로 펼쳐 보인다. 도니 트럼펫 앤 더 소셜 익스페리먼트, 앤더슨 팩의 성공적인 국내 이식이자 힙합 신과 인디 밴드의 근사한 콜라보레이션이다.
박소은 ‘재활용’
실패와 패배의 기억으로부터 아름다운 치유와 야망의 메시지를 추출하는 싱어송라이터 박소은은 두 번째 정규 앨범 ‘재활용’을 통해 산뜻한 감정 분리수거를 펼친다. 공허와 결핍, 망가짐의 경험을 진솔히 고백하는 박소은의 노랫말은 더럽고 치사한 통속성 덕에 매력적이다. 간결하게 기억에 남는 멜로디의 기타 팝이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보편의 정서를 뒷받침한다. 평범하고 서툴러도 누구에게나 소중한 진심이 있다는 것을 일깨우는 작품이다.
유라 & 만동 ‘이런 분위기는 기회다’
무기력한 시간, 축 늘어진 채 어떤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채로 흘러가버리는 순간. 이것을 수렁 혹은 난파라 명명하는 순간 더욱 몸의 힘은 빠져버리지만, 유라는 오히려 ‘이런 분위기는 기회’라 다짐한다. 크로스오버 재즈 밴드 만동과 함께한 프로젝트 ‘이런 분위기는 기회다’는 진공의 카오스에서 끝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정신과 물질을 건져내는 작업이다. 유라와 만동은 그저 살아가는 것을 그만두려 하는 이들, 전환점을 짚고 다시 일어서려 하는 누군가를 위해 힘찬 마법의 항해를 시작한다.
검정치마 ‘Teen Troubles’
1999년 미국 유학 시절의 경험을 콘셉트 앨범으로 완성한 ‘Teen Troubles’는 이방인의 날카로운 시선을 휘두르던 검정치마의 초기작을 떠올리게 한다. 코로나19가 야기한 과거와 현재의 단절, 중년의 회한이 상처 입은 노스탤지어로 발현된 작품이다. ‘사랑 시리즈’를 어정쩡하게 마무리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로 서사를 국한했는데도 ‘Teen Troubles’는 Y2K 시기 유학의 경험이 대중음악계에 등장해 동경과 공감의 대상이 되었던 2022년의 상징적인 앨범으로 기억된다. 논란을 즐기는 콘셉트와 조휴일의 훌륭한 송라이팅 덕이다.
스테이씨 'YOUNG-LUV.COM'
'ASAP' 원 히트 원더의 우려를 깨끗이 씻어낸 'YOUNG-LUV.COM'은 스테이씨가 선사하는 아찔한 롤러코스터 팝 앨범이다. 감각적인 셔플 리듬 위 능수능란한 완급조절을 선보이며 하이라이트 파트의 쾌감을 극대화하는 싱글 'RUN2U'부터 아기자기한 'Same Same', 유연한 알앤비 '247'과 직관적인 뉴웨이브 곡 'Young Luv'까지 지루할 틈이 없는 앨범은 현대적인 힙합 알앤비 곡 'Butterfly', 'I Want U Baby'까지 높은 밀도를 자랑한다. 안정된 음악 토양 위 사랑이라는 주제 하나로 전력 질주하는 스테이씨의 정공법이 제대로 통했다.
뉴진스 'NewJeans'
'뽕'의 250, XXX의 프랭크(FNRK), 다수의 케이팝 작업에 참여한 일바 딤버그(Ylva Dimberg)가 주축을 이룬 프로듀싱 팀은 단 네 곡으로 2022년 케이팝 시장을 점령했다. 고자극 일렉트로 팝이 주류를 이루던 케이팝 시장에서 시대를 특정할 수 없게 하는 힙합, 알앤비 기반 코드워크와 전면에 나서지 않는 사운드를 주축으로 삼은 앨범의 위력이 대단했다. 신세대에게는 도통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유형의 음악이었고, 케이팝을 듣지 않는 음악 마니아들과 중장년층들은 유년기 자신이 동경했던 뮤지션들의 익숙한 정취를 느꼈다. 화려한 퍼포먼스 공개 이전에 별도 공지 없이 뮤직비디오 선공개로 출발을 알리고, 음악 하나만으로 정면돌파를 선언했다. 어도어와 민희진 사단의 일사불란 지휘로 구축된 뉴진스 체제는 케이팝의 출발점, 케이팝의 정수를 가장 현대적으로 복각한 하나의 현상이었다.
스트레이키즈 'ODDINARY'
'NOEASY'로 극단의 에너지 레벨과 정제되지 않은 표현의 정점을 찍은 스트레이키즈는 올해 'ODDINARY'를 통해 한층 유연한 태도로 음악적 성장을 증명했다. 경악과 기괴함을 통해 케이팝 신에 이름을 새긴 그들의 커리어를 통칭하는 듯한 제목의 앨범은 비정상을 긍정하는 집단의 자유로운 언어와 폭넓은 장르 활용이 빛나는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으스스한 무드 아래 극도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거미줄'과 '땡', 타이틀 'MANIAC'이 각 파트를 킬링 포인트라 삼을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한 개성과 자극적인 사운드를 갖추고 있으며, 'Charmer'와 'Muddy Water'의 힙합과 'Lonely st.', '피어난다'의 서정적인 팝이 균형을 맞추고 있다. 창작하는 보이그룹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앨범이다.
태연 'INVU'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캐릭터가 양날의 검으로 작용하던 태연의 솔로 커리어가 'INVU'로 아름답게 수렴했다.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와 오리온 신화를 차용한 태연은 어느 때보다도 우아하고 고귀하지만 그가 노래하는 질투의 언어는 오히려 그 세속성으로 인해 대중가요로의 생명력을 얻었다. 새 출발과 거대한 외침 대신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며 인연을 추억하는 'INVU'는 정적인 무드 아래 매혹적인 사운드와 태연의 단단한 가창으로 빛나는 작품이다. 시린 달빛 아래 안녕을 고하는 앨범은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과 더불어 올해 가장 쓸쓸하고도 황홀했던 고별인사였다.
큐 더 트럼펫(Q The Trumpet) '기분세탁'
긴 경력을 보유한 트럼펫 주자이자 프로듀서, 래퍼, 보컬 등 다양한 재주를 갖춘 큐 더 트럼펫은 두 번째 정규 앨범 '기분세탁'으로 보편의 정서를 어루만지는 매력적인 작법을 선보였다. 피아니스트 임채선, 지난해 '어설픈 응원가'를 발표하며 이름을 알린 박기훈과 윤석철트리오의 참여로 기분 좋은 재즈의 정취가 넘실대는 작품은 올티, 김미정, 스프레이, 폴카이트, 키드와인, 제이문 등 래퍼들의 일상 고백을 더하며 매력과 보편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 젊은 창작가들의 자신감과 통통 튀는 아이디어가 트럼페터 큐의 지도 아래 깨끗이 세탁되어 곱게 개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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