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타포트 2024, 이제는 다른 이야기를 시작할 때
팬데믹 이후 성장을 이어온 국내 음악 페스티벌 시장의 정점에 펜타포트가 있다. 허허벌판 송도 공원은 주위 가꿔진 빌딩 숲처럼, 치열한 티켓 예매 전쟁을 통해 선택된 10만 명 이상의 관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전국 공연장 무대에서 ‘펜타 가자!’를 외치는 관객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록 페스티벌 경쟁 구도를 거쳐 주최사 변경 과정까지, 살아남은 자가 가장 강했고 한국 여름을 대표하는 음악 축제로 자리 잡았다. 꿋꿋이 자리를 지킨 마니아들부터 음악에 흥미를 느끼는 정도의 대중, 페스티벌에 흥미를 갖지 않은 이들 모두가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에 모인다. 팬데믹은 끝났고 축제는 자리를 잡았다. 이제는 다른 이야기를 시작할 때가 왔다.
2024년의 펜타포트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다른 사고방식의 사람들이 정말 많이 모여있는 음악 광장이었다. 출연 음악가들부터 록이라는 넓은 범주 아래 가지각색의 음악가들이 출연하는 다양성의 차원에서 광장이라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페스티벌을 둘러싸고 나온 이야기와 현장의 분위기는 다중 추돌에 가까웠다. 당연하게 여겨왔던 많은 것들이 당연하지 않아졌다. 우리의 것과 모두의 것이 대립했다. 몇 가지 질문을 던지며 돌아보자.
여름에 페스티벌을 꼭 열어야 할까? 최악의 폭염으로 모두가 기후 위기를 체감하고 있는 가운데 이제는 진지하게 공연 일정을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일본 주요 페스티벌 셋리스트에서 출연진을 정해야 하는 한계상 쉬운 일은 아니다. 지난해 대비보다 많은 폭염 대책이 마련됐고, 실제로 효과도 있었다. 하지만 불지옥 같은 축제 현장은 여름 페스티벌을 처음 경험하거나 비교적 선선한 날씨 혹은 실내에서 열리는 페스티벌 경험자들에게는 상식을 뛰어넘는 곳이었다. 이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고 생각할 정도로 많은 티켓 판매량과 공원을 꽉 채운 인파, 엉망이 된 셔틀버스 운행과 복잡한 대중교통 이용으로는 버티기 어려웠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내실을 더 다져야 한다. 이웃 나라 무대를 의식하지 않고도 출연진을 구성하는 독특한 방향성과 개성, 수익성이 요구된다.
사실 올해의 펜타포트는 다양한 취향의 관객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라인업을 가지고 나왔다. 감동의 무대를 선사한 다크 미러 오브 트래지디와 렘넌츠 오브 폴른, 세풀투라 아래 메탈 팬들이 결집한 가운데 반대편에서는 킴 고든의 노이즈, 라이드의 슈게이징, toe의 매스 록이 독특한 열대의 밤을 만들었다. 턴스타일의 하드코어 펑크 커뮤니티 집합과 잭 화이트의 블루스 기타 강의, 기분 좋은 녹황색사회 그리고 데이식스, 한국 인디 록에서 가장 이름있는 그룹들이 대거 포진했다. 경이로운 이상은의 무대로 거장을 소개하는 시간까지 확보했다. 음악 불모지 한국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최선의 라인업이다. 하지만 올해는 유독 ‘록페 출연의 자격'을 묻는 목소리가 많이 들렸다.
록 페스티벌에는 어떤 음악가가 출연해야 할까? 명단 공개 시점부터 출연 자격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록’ 페스티벌이 아니라 ‘음악’ 페스티벌로 성격을 바꾸어가는 해외 페스티벌 사례와 관객 동원력, 대중의 무관심이 겹쳐 ‘록 부심’ 해프닝으로 유야무야되었다. 이제 세계에서 ‘록 페스티벌'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축제가 그리 많지는 않고, 거대 팬덤을 가진 그룹 및 음악가의 출연은 높은 티켓 판매량을 보장한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기울어진 한국 음악 시장의 운동장에서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마냥 무시하는 태도 또한 바른 자세는 아니다. ‘록부심을 부리는 젊은 세대’가 늘었다면, ‘왜 그들이 록부심을 갖게 되었는지’부터 역으로 짚어봐야 한다.
그렇다면 ‘록페의 언어'는 무엇일까? 일정 규모 이상의 팬덤과 관객을 동원할 수 있는 출연자들은 그들을 굳게 믿고 크게 감동하는 사람들 앞에서 여느 때처럼 행복하고 감격스러운 순간을 보냈다. 하지만 록페 현장에 팬덤의 언어가 들릴 때의 거부감은 상당했다. 록 페스티벌 자체 대기 순번 및 입장 줄서기의 충격은 컸다. 이른 오전부터 펜스를 잡고 버티며 무대와 가까운 지역을 사수하는 수준을 넘어 음악 방송 공방을 뛰는듯한 행보에 많은 이들이 경악했다. 다행히 주최 측의 강력한 조치로 무마되긴 했지만, 타 출연자에 무관심으로 일관하거나 관람을 방해했다는 제보가 속속 들려온다.
그들이 록페의 언어를 몰라 벌어진 일이라면, 이번 사건이 록페의 언어를 배우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그런데 ‘록페의 언어'는 모두 정당할까? 팬데믹 이후 펜타포트에 비교적 ‘개근’하는, 팬덤을 동원할 수 있는 팀들의 무대를 보면 아리송하다. 페스티벌이 투어의 일환이 아닌데도 매번 똑같은 셋리스트와 똑같은 연출, 똑같은 편곡, 똑같은 무대매너를 기계적으로 선보이는 모습은 공연이 아니라 스케줄 소화에 가까워 보인다. 그럼에도 쏟아지는 박수갈채와 환호성이 마음을 복잡하게 한다. 번번히 음향 침해 논란과 앵콜 이슈가 터지는 가운데 몇 출연자들도 악평을 피할 수 없었다. 공연장 배치와 페스티벌 경험을 떠나 매년 반복되는 문제인 만큼 개선의 움직임이 필요해졌다. 모두를 위한 축제가 허상이라면, 서로 다른 언어를 옮겨줄 통역가가 많아져야 한다.
충돌은 곳곳에서 감지됐다. 공연마다 하드코어의 관습을 지키며 무대 위 관객들과 함께 뛰노는 턴스타일이 보수적인 한국에서 수백 관객들을 메인 스테이지에 올려놓으며 한국 공연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무대에 기어 올라가는 순간은 록 페스티벌의 존재 가치 그 자체였다.
반면 수없이 만들어지고 사라졌던 모쉬핏과 슬램존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곳도 올해의 펜타포트다. 누군가에게는 색다르고 즐거운 경험이었겠지만, 음악을 숙지하지 않고 벌이는 과격 행동과 주위 환경 및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록 놀이’는 불쾌지수를 크게 높였다. 관람에 방해가 될 정도의 슬램과 뜻만큼은 하나였던 턴스타일 펜스 앞 하드코어 모슁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움직임이었다. 팬데믹 이전에도 종종 나오던 이야기였던 것이 사실이나, 팬데믹 이후 가장 크게 달라진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아수라장이 시간의 단절로 벌어진 일이라면, 그 공백을 어떻게 메울 수 있을까? 범람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았던 깃발부대와 슬램 존을 촬영하며 난생처음 다른 사람들과 몸을 부딪쳐본 관객들에게 어떻게 더 안전하고 재미있는 ‘록 놀이' 가이드를 제공할 수 있을까?
텅 비어있던 잔디 광장을 어떻게 채울지 고심하던 시기는 지났다. 팬데믹 이후 다시 만난 공연 자체에 감격하던 보정 효과도 사라졌다. 스트리밍 보편화로 인한 개별 감상과 획일화된 음악 시장에 대한 반감이 록이라는 장르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수없이 많은 소셜 미디어 계정과 세련된 크리에이터들이 밴드 음악의 봄을 고대하며 공동체를 이끌고 있다. 그리고 이에 흥미를 느낀 이들이 록페를 체험하러 불볕더위를 감수하고 현장을 찾는다.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다.
매년 축제 현장을 찾는, 또 찾게 될 우리가 지향해야 할 태도는 분명하다. 배타적인 웅크림과 갈라치기 대신 인내심과 포용, 상호 존중과 협동심이 필요하다. 모르는 가수의 음악도 현장에서 한 번 들어볼 마음의 여유,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과 모두가 함께해야 할 순간을 구분하는 넓은 시야, 비난 대신 친절한 안내가 필요하다. 그래야 서로의 언어를 배울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본 것 그대로, 있는 그대로 솔직히 의견을 표할 수 있어야 한다. 마냥 다 좋고 다 감동할 수 없다. 무대에 오르는 음악가들에게도, 무더운 날씨에 고생하는 음악 팬들에게도 정확히 이야기하는 편이 낫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아쉬운지를 구분할 수 있는 심미안을 갖춰야 페스티벌이 더욱 재미있어진다.
사실 나는 매우 보수적인 페스티벌 팬이다. 오랫동안 페스티벌은 당연히 덥고, 고생해서 음악 듣는 수행의 장소이며, 다음날 삭신이 쑤실 정도로 뛰어놀아야 진짜 페스티벌을 즐겼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 내가 3일 내내 현장을 오가며 무언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4년 펜타포트는 정말 복잡하고 많은 고민거리와 생각할 지점을 던져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