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범 리뷰가 필요한가? ②
앨범 리뷰가 필요한가? ①에서 이어집니다.
C
2010년대 중반에서 2010년대 후반으로 넘어가는 이 시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개별 앨범 대신 플레이리스트 리뷰는 어떨까요? 물론 스트리밍 서비스의 플레이리스트는 메이저 레이블에 의해 암묵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자금을 지원받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현재 음악의 변화를 보기 위해서는 플레이리스트를 살피는 행위도 우리에게 무언가를 알려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4집은 어떻다, 7집은 저렇다.’ 이렇게 의논하는 것보다,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에 진지하게 참여하려 하는 방식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좀 이상한 아이디어일 수도 있지만요. 인간 상호적인 형태, 사운드의 특정 진화에 투자 한 기업의 이익을 염두에 두면서 사운드가 어떻게 진화하고 유지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이 플레이리스트 리뷰라면, 유효한 비판적 탐구 방향이 될 수 있을까요?
J
사람들이 돈을 내고 음악을 듣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뭐가 더 낫다는 건 아니지만, 플레이리스트를 진지하게 바라보는 것도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스포티파이 하이퍼팝(Hyper Pop) 플레이리스트를 살펴보죠. 그 플레이리스트의 효력은 어느 정도일까요? 리스트에 오른 가수들이 메이저 계약을 맺었죠.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아요.
C
글레이브(Glaive)의 사례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글레이브는 하이퍼 팝 플레이리스트 환경에서 유명해졌지만,계약을 맺고 나서는 다른 차원으로 한 단계 도약했습니다.
J
글레이브가 얼마나 앨범을 팔았죠? 네. 바로 그 지점이 하이퍼 팝의 결함이죠. 그 플레이리스트가 실제 파티로 이어지나요? 무엇을 의미하죠? 하이퍼 팝이 정말 하나의 신(scene)인가요? 아니면 누군가가 벽에 페인트로 칠해놓은, 토마토를 던질 가상의 표적일 뿐인가요? 신 기반의 플레이리스트에 붙은 스포티파이의 설명은 실제 음악 신과 많이 다릅니다. 댄스홀, 힙합, 발리에 펑크 같은 음악이 매력적인 이유는 실제 문화가 존재하고, 파티가 자주 열리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추억을 공유하고 문화를 만들죠. 같은 공간에 있지 않아도 이런 음악을 들으며 공동체 의식을 느끼잖아요.
C
저는 그런 공동체 의식이 인터넷 공간에서도 기능하고 있지 않는가를 질문하고 싶습니다. 스포티파이 플레이리스트가 공간의 역할을 맡을 수는 없나요?
J
글쎄요. 저는 말씀하신 인터넷 네이티브 하위문화들이 근본적으로 불안정한 플랫폼에서 이뤄지고 있는 소통이라는 점에서 회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팬데믹 시기에 밴드캠프, 디스코드 등 다양한 커뮤니티 공간이 등장했죠. 그런 환경이 지속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순식간에 펑 하고 터져 사라지는 광경은 많이 봤거든요.
C
흥미롭습니다. 제겐 얼마나 지속되느냐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사라지겠지만 다른 현상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거나, 몇 명의 개인이 조금 다른 환경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은 종류의 혁신이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하이퍼 팝의 순간이 훌륭한 앨범과 싱글 플레이리스트를 만든 것처럼, 한 세대의 사람들이 다음 세대에게 색다른 방식으로 음악을 만들게 영감을 주지 않았나요. 물론 10년, 20년 후에 제대로 평가가 가능하겠지만요.
J
그렇다면 이 현상을 음반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요? 새로운 음악이 나오지 않는다면요? 대중이 무한한 인내심과 무한한 음악 용량을 갖지 못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앨범 제작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창의적인 결정의 모든 순간에 대중이 관심을 가질 수 없게 되는 때가 오는 겁니다. “아, 이제 새로운 장르는 충분히 나왔어. 나이트코어, 플러그 같은 새로운 하이브리드 음악이 많다고. 이제 뭐가 나오든 상관없어.”라 이야기하는 시대가 오면 어떡하나요. 로큰롤, 힙합, 레게톤처럼 그런 새 장르의 팬이 줄어들고, 수익이 줄어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디지털 플레이리스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말한 대로 새로운 현상이 신경계처럼 뻗어나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들이 자기 방에서 무한히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데 시장은 그 결과물을 쓰레기처럼 바라보고, 소비하지 않는다면요? 그렇다면 이처럼 작은 장르 플레이리스트들은 빠르게 폭발하고 사라져 버리는 겁니다. 일종의 사기가 되는 거죠. 파티도 없을 테고요.
C
말씀해주신 일련의 ‘무상함'은 매체 자체의 필수적인 부산물인가요? 말씀해 주신 무상함, 그리고 그 수입 잠재력 감소는 스트리밍 생태계의 문제라는 말씀인가요?
J
네. 음악을 소비하는 과정도 많이 변했지만, 음악을 만드는 과정도 2~30년 전에 비해 많이 변했어요. 많은 사람이 말 그대로 ‘혼자 어두운 방'에서 음반을 만들죠. 어떤 각도에서든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프로듀서, 음악가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써서 음악을 만드는지를 이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의미에 대해 자주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리고 스트리밍 시장이 그런 음악 제작 과정에 대한 수요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보여준 적이 있나 싶습니다.
1960년대 초의 밥 딜런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자작곡으로만 앨범을 내어 주류 음악계에 진입한 사람입니다. 그는 아직 살아있고, 지금도 투어를 다니고 있습니다. 레코딩 아티스트가 혼자 방에 앉아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인식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된 개념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그런 행위와 모습이 가치 있고 중요하다는 판단을 내렸죠.
스트리밍 시대의 청취자들이 그런 시각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어요. 희소성의 문제에서, 특히 시장의 힘이 모든 측면을 형성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의 생활 경험은 이런 행위들이 가치가 있느냐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앨범에 대한 고전적인 생각을 미래에도 계속 가져가야 할까요?
C
음악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화두로 돌아가 보죠. 흔들리지 않는 기반을 가정했을 때, 일시적으로 등장하고 사라지는 음악을 다루는 데 있어 음악 비평과 저널리즘이 유효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널리즘과 비평은 그 음악을 공식화하고 강화하기 위한 것인가요? 아니면 근본적으로 임시 작업일 뿐인가요?
J
직업으로서의 음악 글쓰기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장이 이 질문에 답을 한 것 같아요. 특히 혹평받는 앨범을 리뷰하는 데 지불하는 돈, 그리고 그렇게 작동하는 방식의 글쓰기에 사람들이 얼마나 가치를 부여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소개하고 싶은 사례는 팬데믹 기간의 미츠키(Mitski)입니다. 미츠키는 2010년대 미국 인디 레이블을 대표하는 아티스트로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았습니다. 미츠키처럼 경력 내내 평단의 주목을 받았던 아티스트는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그 상찬이 지금처럼 미츠키를 빌보드 핫 100 차트에 올리진 못했습니다.
NPR 코어 팬들과 미국 독립 레이블들은 핫 100 히트를 기록할 수 있는 노래를 만들 수 있음에도 그들만의 논쟁을 벌이느라 성공에 실패했습니다. 사람들은 팬데믹 기간 이전에도, 지금도 틱톡, 혹은 사람 대 사람으로 음악을 추천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틱톡이 없었다면 오늘날 미츠키의 성과도 없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현재 미츠키의 음반을 적극적으로 구매하고 미츠키의 공연에 가서 음악을 듣는 청중을 낳은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비평의 형태가 많이 힘을 잃었습니다.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C
제가 뉴욕타임스에서 일할 때나, 프리랜서로 활동할 때나 ‘단위 비평(Unit Criticism)'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라이브 리뷰가 ‘단위 비평'인 것처럼, 앨범 리뷰도 어느 정도는 단위 비평이죠. 아티스트나 사운드, 장면에 대해 총체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을 어떤 특정 단위에 끼워 넣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성공적인 결과도 있었고, 실패하는 경우도 있었죠. 아티스트 스스로가 매 순간, 노래에서 노래로, 앨범에서 앨범으로, 전 앨범과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목적이 없다면 이런 ‘단위 비평'은 미시적 초점으로 아티스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신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은 정말 가치 있어요. 프리랜서로 일할 땐 현장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더 많이 노력했죠. 피치포크의 알폰스가 최근 밀워키 랩에 큰일을 하기도 했고요. 개별 녹음 결과물이 아니라 전체 장면으로 봐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2023년 밀워키 랩의 전체적인 수준을 보면 성숙한 작품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J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새 음반은 쏟아지는데, 대중이 이 작품에 관심을 모두 두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영어로 된 음악 앨범이 너무 많이 나와요. 그래서 앞으로 개척해야 할 영역은 영어권 밖 음악이 될 겁니다. 이미 그런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어요. 브라질의 스포티파이 시장은 미국 시장만큼이나 큽니다. 그리고 이들 국가 중 일부는 미국보다 빠른 음악 시장 성장세를 보입니다. 향후 10년, 20년 안에 다른 나라에서 더 많은 청취자가 등장할 거로 생각해야 합니다. 아마 그곳에서 새로운 형태의 글이 주목받을 수 있을 겁니다.
C
그건 맞는 말입니다. 10년 전만 해도 힙합의 중요성, 1980년대와 1990년대, 2000년대 팝 음악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주류 팝 평론가로서 일할 수 없을 거라고 말했을 거예요. 하지만 앞으로는 레게톤을 포함한 멕시코 지역 음악, 아프로비츠, 그리고 케이팝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실제로 제가 언급한 음악 장르는 부분적으로 미국 음악의 혁신 일부를 합성하고 다른 영향력을 증폭하여 내보내고 있습니다. 누군가 ‘팝(Pop)’ 평론가라는 직업을 갖고 싶어 한다면… 10년 후에는 그 직업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 계신가요? 지금 제 이야기를 잘 들어두세요. (웃음)
J
제가 처음 트윗을 올렸을 때 기억에 남는 반응 중 하나는 ‘앨범 리뷰가 시민 저널리즘(Non-Stand Journalism) 최후의 보루’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그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뉴욕타임스에 고용된 사람들은 일종의 셀러브리티 관점에서 음악을 접근하기 때문에 비평의 연속성과는 큰 관련이 없을 겁니다. 재즈 잡지가 예전부터 지금까지 굴러가는 이유와 마찬가지죠.
C
(웃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비평 일을 하면서 느끼는 좌절감은 제가 이 방송에서 꼭 많이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매주, 매일매일 절감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쇼에서 대화를 통해서든 젊은 작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든 그 빈자리를 메울 세대가 생기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야심차게 일하고, 아이디어를 통해 탈중심적인 결과물을 내놓을 때 그것을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바랍니다.
J
네. 미디어, 출판물을 소유한 이들이 수익을 좇는 것보다 이런 결과물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