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민 인터뷰
수민은 깊고도 넓은 음악의 바다를 항해하며 창작의 영토를 넓혀갔다.
팔방미인, 다재다능, 자유자재... 음악가 수민에게 따라붙는 영광의 수식이다. EBS 스페이스 공감 선정 2004년부터 2024년까지 명반에 선정되며 한국 R&B 시장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남게 된 데뷔 앨범 'YOUR HOME'부터 가장 최근의 EP '시치미'까지, 수민은 깊고도 넓은 음악의 바다를 항해하며 창작의 영토를 넓혀갔다. 우원재, 피셔맨, 자이언티, 슬롬 등 매력적인 음악 동료들과 함께 언제나 새로운 영역을 포착하고자 촉각을 곤두세웠던 그는 이제 '책임감있는 음악'을 위해 좋은 삶과 좋은 창작의 균형을 잡고자 노력하고 있다.
일본 블루노트 플레이스에서 가진 풀 라이브 세션 무대부터 최근 에스파의 'Armageddon', 레드벨벳의 ‘Bubble’ 참여, 아시안 팝 페스티벌에서 프로듀서 슬롬(Slom)과의 공연을 통해 ‘Miniseries’의 차기작을 예고한 수민을 만나 그의 음악 세계를 이야기해보았다.
최근 수민의 활동을 훑어보며 시작해보자. 먼저 페퍼톤스의 20주년 기념 앨범 ‘Twenty Plenty’의 1번곡 ‘계절의 끝에서'를 리메이크했다.
‘계절의 끝에서'는 페퍼톤스의 노래 중 가장 좋아하는 곡이다. 사실 고민이 많았다. 페퍼톤스의 음악은 대체로 오가닉한 감성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고, 편곡에서도 기타 중심의 록밴드 사운드가 두드러진다. 나의 음악 프로덕션과는 조금 거리가 있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한 격차를 메우고 장르적 시도를 어떤 수준에서 진행할지에 대해 다방면으로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게 나왔고, 페퍼톤스도 좋아해주어서 잘 마무리된 프로젝트라 생각한다. 작업과정에서,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일관되게 청춘을 상징하는 메시지를 많은 이들에게 전하며 음악을 해온 페퍼톤스에 대한 신뢰와 존경의 마음이 생겼다. 1인 뮤지션으로 살면서도 음악 생활을 장기적으로 이어가는 것이 굉장히 어려울 때가 많은데, 2인 체제는 더 어려움이 많지 않을까. 돈으로 살 수 없는 유대와 연대를 느꼈고, 많이 배웠다.
신예 싱어송라이터 피다(PIDA)의 ‘류'에도 이름을 올렸다.
피다는 아예 왕래가 없던 아티스트였다. 내가 메일을 늦게 확인하는 편이라 하루는 쌓인 내용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피다의 메일을 꽤 오랜 텀을 두고 확인하게 된거다. 음악부터 먼저 듣고 메일 본문을 확인하는데, 음악이 너무 좋았다. 연고 없이 인디펜던트로 활동한다는 점에서도 동병상련의 마음이 있었다. 바로 전화를 걸어서 작업을 함께하게 되었다. 보기 드문 디테일을 갖추고 있는 음악가라고 생각한다. 좋은 의미로 고집스럽게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치려 하는 모습을 보며 과거의 내 모습도 생각났다.
꾸준히 교류하고 있는 프로듀서 피셔맨(FISHERMAN)의 ‘Slide’에서도 기리보이와 함께했다.
슬롬처럼 애정하는 프로듀서고, 같은 스탠다드 프렌즈(Standard Friends) 소속이다. 서로 암묵적으로 합의하에 도와주는… 그런걸 바터(Barter) 관계라 하지 않나. 구태여 설명하기보다는, 수민과 피셔맨의 조합이 또 한 번 나왔다는 느낌에 가까운 곡이다. 피셔맨이 나의 목소리 소스를 가지고 여러가지로 활용하며 디테일을 깎아가는 모습에서 그의 섬세함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기리보이와는 대면 작업을 하지 못했는데, 오히려 그 점이 ‘원격 애정놀이'를 펼쳐나가는 것 같아 좋았다. 최근 노래는 모두 순탄하게 작업했다.
한국 활동과 더불어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수민의 경력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가오는 지점은 일본에서의 활동이다. 먼저 일본 R&B 아티스트 시럽(SIRUP)과 함께 TV 드라마 ‘루트'의 주제곡 ‘Roller Coaster’를 발표했다. 수민이 한글 가사로, 시럽은 일본어로 노래를 부른다. 흥미로웠다.
시럽과는 ‘Keep In Touch’ 이후 두번째 협연이고, 프로듀서 A.G.O와 함께 작업한 곡이다. 원래 노래가 드라마에 사용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곡을 어떻게 풀지만 고민하다가 소식을 들었는데, 그 전부터 노래 가사에 ‘택시'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루트'라는 드라마가 일본의 ‘오드 택시(Odd Taxi)’라는 애니메이션의 실사판에 가까운 작품이라 신기한 경험이었다. 이후 우리도 보다 자유롭고 편안하게 작업을 풀어나갔다. 아직도 일본 드라마 주제가에 한국어 가사가 등장한다는 점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실제로 수민의 스포티파이 주 청취 지역을 살펴보면 1위가 일본 도쿄, 2위가 대만 타이페이, 3위가 서울이다. 한국 R&B 아티스트인 수민이 아시아 시장에서 유의미한 스트리밍 지표를 보인다는 점이 흥미롭다.
대략 체감은 하고 있었다. 소셜 미디어로부터의 연락부터 타국에서의 인기를 짐작하게 되는 순간이 자주 있는데, 지표로 등장한다니 나에게는 기쁜 일이다. 일본 음악과의 교류도 보다 선명하게 체감된다. 과거에는 일본 아티스트와의 콜라보레이션은 메인스트림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지난해 2023년 12월 도쿄 블루 노트 플레이스에서의 밴드 세션 공연은 수민의 일본 시장 활동에 있어 중요한 순간이다. 블루 노트 오피셜 유튜브 채널에서도 수민의 영상을 업로드하였고, 많은 음악 팬들이 라이브 클립을 주목했다. 블루 노트 플레이스에서의 공연 이야기가 궁금하다.
시작은 지난해 일본 프로듀서 부다멍크(Budamunk)의 블루 노트 플레이스 공연이었다. 함께 일하는 아트 디렉터 소요(SOYO)와 함께 일본 출장 중 시간을 내서 갔는데, 놀라웠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중규모 베뉴, 최상의 음향 시스템, 분위기, 일하는 관계자들의 태도… 모두 반했다. 꼭 이 공간에서 공연을 해보고 싶었다. 이후 ‘시치미' EP 발매와 동시에 앨범 활동을 기획하면서, 프로모터 욘욘(Yonyon)과 함께 일본에서의 일정을 미리 짰다. 블루 노트 플레이스에서 신 사카이노(Shin Sakaino)가 마스터로 있는 밴드와 수민의 결합된 형태의 무대를 기획했다. 기존 발표곡과 더불어 ‘시치미' 수록곡을 거의 다 연주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유튜브 클립의 인기가 많아서 일본 음악 청취자들이 그 영상을 통해 나의 음악을 듣고 유입되는 경우가 많더라. 너무 만족스러운 공연이었다.
현지 밴드와의 협연을 결정한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텐데. 수민에게는 여러모로 얻은 것이 많은 공연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일본스러운' 부분, 소소하지만 정교하고 꼼꼼하게 만들어나가는 태도를 음악에서 장점으로 많이 느꼈다. 스타일의 차이가 양국에 있는데, 한국 작업자들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뢰가 많이 작용한다. ‘말하지 않아도 알지?’, ‘나는 널 믿어!’ 이런 감정이 크다. 반대로 일본은 정말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물어본다. 내가 이 부분을 건드려도 되는지, 곡 길이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역할 배치, 포지션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시치미' EP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2~3년의 공백을 딛고 발매한 작품이었다. 개인 이름으로 결과물을 발표하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다른 매체에서 한 번 언급한 적 있었는데… 저장 장치에 문제가 생겨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 심지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데이터가 날아갔다. 이 콘텐츠를 보고 있는 모든 분들께 백업의 중요성을 강조드린다. 아무튼 그렇게 작업물을 모두 잃고 나니 초연한 상태가 되어, 차근차근 다시 작업을 해나갔다. 재건하고 나니 사실 처음 내가 만들었던 버전보다 훨씬 좋게 나왔다. 더 꼼꼼하게 체크하고, 정교하게 만들려 노력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기억나는 부분이 있다면.
지금에서야 드는 생각으로는 첫번째 버전이 맵시가 없었던 것 같다. 수민 특유의 리듬을 쪼개는 방식, 가사를 맛있게 표현하는 느낌 등 여러가지를 비교해봤을 때 현재 ‘시치미'에 비하면 부족했다.
기술적 이슈와 더불어 ‘시치미'는 과거 수민이 발표했던 진취적인, 과감한 메시지를 던지는 음악과는 반대로 ‘Miniseries’ 등 작품에서 들을 수 있었던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가 들려 다르게 다가온 작품이었다. 인생의 굴곡과 관계의 어려움, 자주 보이는 소재 등을 활용하여 비유하는 표현이 새롭게 다가왔다. 다채로운 감정폭을 담고 있는 ‘시치미' 앨범이다.
양가감정을 표현해보고 싶었다. 사람이 하나의 감정만으로 살아갈 수 없지 않나. 모순적이고, 어그러지고, 재미있다가도 울적해지고, 그게 사람 사는 일이고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 사람 아닌가. 어떤 메시지를 의도해서 담았다기보다는, 만든 음악의 노랫말이 자연스럽게 그런 내용으로 나왔다. 대중이 보기에는 내가 하고 있는 일과 내가 내놓은 결과물이 반짝반짝하게 보일거고, 실제로 나도 그런 반짝거리는 자리에 자주 갈 일이 생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너무 좋고 재미있는데, 이 모든 사람들과 관계를 이어나가는 일이 힘들어졌다. 누구를 위해서 인간관계를 이어나가야 하는 거지? 싶은 생각이었다. 어떤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갑자기, 문득 든 생각이었다. 이후 사람들과 연락하는 게 조금 어려워졌다. 지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최대한 업무 관련 소통만 진행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의 감정이 ‘시치미'에 담겨있다.
수민의 커리어 초기에는 미래지향적, 혹은 현실에 없을 것 같은 존재나 다른 세계를 꿈꾸는 사운드가 두드러졌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인지 이번 ‘시치미' 앨범의 경우 정교하고 섬세한 프로듀싱과 더불어 ‘인간극장'과 같은 소탈한 메시지가 더욱 깊이 다가왔다.
‘다음주 우리 커피 한 잔 할까?’, ‘술 한 잔 할까?’. 으레 이런 말을 하면서 약속을 잡고 연락을 이어나가지 않나.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모든게 다 이상하게 다가왔다. 연락을 하기 싫고, 약속이 취소되었으면 좋겠고… 그런 이상하고, 어찌보면 못된 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나온 곡이다. 나쁜 버릇을 인정하는 노래이기도 하다. 피처링을 도와준 선우정아 언니에게 곡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언니도 너무 공감해서 마음이 놓였다. 생각보다 많은 아티스트가 이런 고민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타이틀곡 ‘옷장'도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소재를 활용했는데, 피처링 아티스트로 엄정화의 이름이 있어 놀랐다. ‘옷장'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굉장한 사랑 찬미를 하는 곡이다. ‘Your Home’ 앨범에 ‘너네 집'과 느낌을 공유하는 노래로, ‘너네 집'의 다른 버전을 의도하며 작업했다. ‘너네 집'에서 ‘집'이 마음이었다면 이번에는 ‘옷장'이 마음이다. 옷장 문을 열었을때 비싸지 않고, 허름하고 거적때기같은 옷이 괜히 늘상 손에 가고, 매력을 느끼는 옷이 있지 않나. 이런 경험을 사랑 이야기로 풀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너네 집'에서 신세하와 함께한 것처럼, 이번 곡도 어떤 반짝거리는 사람과 함께 해볼까를 고민하며 피처링 아티스트를 찾고 있었다. 그쯤에 방송인 줄리안이 우연히 ‘자기가 엄정화 누나를 소개하고 싶은데, 한남동에서 볼까?’라는 제안을 했다. 그날 만나게 된 정화 언니는 너무 반짝거리고, 아름답고, 홀릴 것 같은 사람이었다. 며칠 지나고 ‘옷장'의 스케치 데모를 듣고 있는데 ‘이거 그냥 정화 언니에게 부탁해보면 안되나?’ 싶더라. 긴장하면서, 용기 내어 막연하게 부탁드렸는데 언니가 흔쾌히 좋다고 해주셨다. 기분 좋은 그루브와 판타지스러운 곡의 요소를 정화 언니가 너무 잘 이해해주셔서, 기분 좋게 작업했다.
‘너네 집' 후렴에는 ‘우리'가 있다면 ‘옷장'은 ‘내 옷장'이다. 수민이 ‘시치미' 앨범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위치를 다르게 가져갔다는 인상을 받았다.
맞다. ‘같이’, ‘우리',’ 함께' 등 표현을 과거 많이 사용했다면, 이제는 조금 더 나 자신을 바라보는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았다. 나의 이야기, 나의 감정을 많이 드러내고 싶었다.
최근 한국 R&B 시장, 그리고 한국에서 R&B 음악가로 살아가는 어려움이 콘텐츠를 통해 공유되어 장르 음악 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바 있다. 선명한 음악 경로를 개척한 수민이 음악가로 살아가는 방법, 그리고 타 음악가들과 함께하며 영역을 넓히는 태도가 궁금하다.
책임감 있는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 데뷔 초에는 엄한 주제, 혹은 나만 공감할 수 있는, 소통 없는 편협한 표현을 써가며 만든 음악도 많았다. 하지만 결국 음악가가 작품을 공표하는 행위는 사람들이 보고 듣는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 아닌가. 말보다 음악으로 표현하는 게 자연스러운 사람이 음악가가 되는데, 그 표현의 무게감을 스스로 잘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최근 내가 느끼기에도 음악가에 대한 오해가 있을 수 있는 사회적 이슈가 많았다. 음악 생태계가 좋아지려면 우리의 격을 우리가 스스로 높여야 한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본인의 삶을 잘 가꾸어야 한다. 삶이 무조건 음악에 반영된다. 기본적인 요소만 신경써도 어떤 장르에서든 음악 생활을 길게 영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릴 때는 정말 몰랐던 사실이다.
그렇다고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르기만 해서도 안된다. 다양한 관계를 즐겨야 한다. 인간관계에 몰입하여 적극적으로 경험을 쌓은 이들이 재미있는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다. 집중하는 과정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부분이 강점이고 어떤 부분이 약점인지를 깨닫게 된다. 이를 자기객관화하여 표현하는 게 아티스트의 일이다. 완벽한 작품보다는 기술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어딘지 모르게 어설픈 느낌을 주는 음악에 더 정이 간다. 그 과정에서 협업도 일어날 수 있다.
최근 자주 듣고 있는 작품은.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과 함께 브라질 음악을 다시 듣고 있다. 슬롬과 함께 ‘Miniseries 2’의 차기작을 준비하는 과정의 일부다.
2025년은 수민이 정식 음원을 발매하고 활동을 시작한지 10주년을 맞는 해다. 10주년을 맞이하는 소감, 그리고 현재 활발히 이어나가는 창작의 과정에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려달라.
벌써 내년이 10주년이라니.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매번 낯설고, 익숙한 건 하나도 없다. 자연스럽게 표현의 스펙트럼이 넓어졌다는 장점은 있다. 앞으로의 계획이라… 해온만큼 오래오래, 천천히 음악을 해나가고 싶다. 조급하게 임하기보다는 양질의 무언가를 만들자는 생각이 크다. 이 모든 과정의 초석이 ‘Miniseries 2’가 아닐까 싶다. 건강하게 매 순간 즐기며 살아가면, 삶이 반영된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