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키(KiiiKiii) 'Dancing Alone'
놀이와 치유로 투영하는 소녀의 세계
‘난 ‘내’가 될 거에여, 난 나답게 더 잘해여’. ‘아이 두 미(I DO ME)’를 외치며 등장한 당찬 소녀들. 그들의 여름날은 어떨까. 부서지는 햇살이 아름다운 고즈넉한 이국의 풍경 속 다시 돌아오지 않을 청춘의 한 페이지를 만끽하는 아이들이 있다. 누구보다도 서로를 잘 안다고 자부하는 우정의 향연.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괜스레 웃음이 나오고, 평범한 일상도 너와 함께이기에 반짝인다. 나란히 앉아 머리를 묶어주고, 아이스크림을 반으로 쪼개 먹고, 이어폰 한 쪽씩을 나눠 서로의 취향을 공유하는 모든 순간이 놓칠 수 없는 추억으로 남는다. 경험은 양가적이다. 노랫말처럼 ‘두 번 다신 안 올 찬란한 순간’이라 더없이 소중하기도, 곧 사라져 버릴 풍경이 안타깝기도 하다. 그래서 소녀들은 춤을 춘다. 크게 팔을 휘두르고,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서로를 바라본다. 서로가 하나로 이어지는 순간에 말은 필요하지 않다.
키키의 싱글 ‘댄싱 얼론(Dancing Alone)’이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속 부서지는 햇살의 과거 여름날을 연상케 하는 복고적인 유로 댄스 계열의 팝이다. 신스 웨이브의 영향을 받은 베이스 리듬이 두근대는 심장의 박동을 옮기는 가운데, 곡 전반에 아련한 노스탤지어의 필터를 씌우는 신시사이저와 조심스레 곡을 보조하는 기타 연주를 곁들인다. ‘아이 두 미’만큼이나 간결하게 다듬어진 곡은 직관적이다. “‘우리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했고, 지금도 그러하고 싶다’는 확고한 마음을 음악으로 전하고자 합니다.”라는 소개가 정확하다. 서늘해진 입추(立秋)의 공기를 맞으며, 우리도 누구나 마음속에 품고 있을 빛나는 유년기의 기억을 되짚어본다.
아이브를 통해 오늘날 청소년 K팝 팬들의 워너비, 이상향을 확립한 스타십엔터테인먼트는 동생 그룹 키키를 통래 그들의 마음을 읽어내어 완전히 동화되고자 하는 자세를 취한다. 아이브가 동경하는 우상이라면 키키는 휴대폰 속 그들을 바라보며 하루를 함께하는 친구 같은 존재다. 높은 자존감과 고난의 극복 서사의 빈자리를 채우는 건 누구나 공감할 수 있고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언어다.
키키의 접근법은 투 트랙이다. 먼저 게임이다. ‘데뷔 송(Debut Song)’과 ‘그라운드워크(Groundwork)’, ‘딸기게임’으로 이어지는 키키의 서사 중심에는 놀이가 있다. ‘데뷔 축하합니다’라는 연예계의 흔한 생일 노래 개사와 자기소개 게임은 낯선 처음의 분위기를 환기하고 서로를 알아가는 계기를 마련한다. 잠시 눈을 감고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자. 소셜 미디어도 스마트폰도 컴퓨터도 없던, 놀이터에서 친구들을 만나 뛰어다니던 시절을 말이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마주치며 박자를 맞추고 노래를 불렀다. 많은 첫 만남이 그렇게 이루어졌다. 아침바람 찬 바람에, 푸른 하늘 은하수.
‘그라운드워크’와 ‘딸기게임’의 크레딧에는 ‘일간 이슬아’ 프로젝트로 유명한 소설가 이슬아가 작사가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나를 소개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은 너를 알아가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만나게 된 너도, 별걸 다 잘하고 눈길 뗄 수 없는 너도 궁금하다. 키키와 함께 손뼉을 치고 구호를 외치며 서로의 눈을 바라볼 때, 오직 강하고 멋진 나, 정상에 우뚝 선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걸그룹 서사가 놓치고 있던 소녀의 세계가 비로소 싹튼다.
특히 ‘딸기게임’의 노랫말은 굉장히 섬세하면서도 재치가 넘친다. 멋진 친구를 향한 시기와 질투가 아닌 미묘한 감정을 묘사한다. 딸기, 당근, 수박, 참외, 멜론… 구호가 복잡해질수록, 외울 게 많아질수록, 마음도 깊어진다. 이 지점에서는 하츠투하츠의 ‘스타일(Style)’이 떠오른다. 독특한 상대의 개성을 궁금해하며 취향을 넓혀가는 소녀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 켄지의 상상이 빛나는 곡이다. ‘넌 왜 늘 튀는데? 진짜 재밌어’. 첫 만남이 너무 어려워진 시대에 달라서 더 좋다는 소녀들, 대상화된 학창 시절과 대리만족 유년기의 기억으로 가득했던 기성의 문법과 완전히 다르다. 새 시대 걸그룹의 서사를 써 내려가는 새로운 대화 수단의 대표적인 가사로 손색없다.

게임의 효과를 증폭하는 방법으로 키키는 케이팝 그룹이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노래와 춤 외 다른 포맷을 찾았다. 공식 홈페이지다. 소셜 미디어 시대에 홈페이지는커녕 마이크로 블로그도 낯설어진 시대에 키키는 재기 발랄한 콘텐츠로 가득 채운 홈페이지를 운영한다. 키키가 인스타그램과 틱톡에서 알파 세대의 문법 그 자체로 꾸미는 피드와는 사뭇 방향이 다르다.
웹사이트라는 형식에 맞춰 내용은 매우 복고적이다. 무료 웹사이트 제작 서비스에서 급하게 만든 듯 엉성하지만, 갖출 건 다 갖춘 21세기 초중반 인터넷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데뷔 EP ‘언컷 젬(Uncut Gem)’ 시절에는 수제 잼을 제작하는 한적한 시골 마을 농부 콘셉트였다. 각 잼 병을 클릭하면 곡마다 다른 테마로 구성된 페이지로 연결되어 키키의 매력을 알렸다. ‘댄싱 얼론’으로 넘어온 지금은 키키 플리 마켓이 됐다. 멤버들이 올린 것처럼 꾸며진 다이어리, 티셔츠, 스티커, 게임기 등을 클릭하면 판매자로 등록된 멤버들의 콘셉트 포토와 설명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게임이 등장한다. 키키의 홈페이지에는 과거 플래시 게임에 익숙한 세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참여형 콘텐츠가 있다. 현재 홈페이지의 DVD를 클릭하면 각기 다른 로고와 색깔, 사진을 가지고 포스터를 꾸미는 칸이 보인다. 상단의 배너를 통해 연결되는 슬러시 게임은 영롱한 색의 음료 비율을 스스로 조정해 저장할 수 있는 코너다. 각 부분을 클릭할 때마다 새로운 콘텐츠가 등장한다. ‘BTG’와 ‘데어 데이 고(There They Go)’ 시절에는 아예 더욱 완연한 플래시 게임의 복원을 시도하기도 했다. 매번 업데이트되는 보물창고처럼 다양한 매력을 선보이는 키키의 홈페이지는 절대 영원하지 않은 디지털의 유한함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향수의 감정을 그대로 재현한다.
한편으로는 2000년대 후반에 태어난 키키 멤버들의 나이를 생각했을 때, 복고적인 홈페이지와 복고적인 오브제들이 낯설게 다가오는 순간도 있다. 영리하게도 키키의 제작자들은 이런 지점까지 예측했다. 페이지 우측, 2000년대 오피스 프로그램을 사용했다면 결코 잊을 수 없는 길잡이 돌고래가 설명하고 있다.
‘아네모이아(anemoia);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시대에 대한 향수를 지칭하는 새로운 용어’.

이를 통해 취할 수 있는 두 번째 전략이 바로 디지털 디톡스다. ‘아이 두 미’와 ‘댄싱 얼론’은 키키의 앨범 지향과 완벽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콩 무당벌레’와 ‘손 끝에 나비’로 팀을 알게 된 팬들은 이후 ‘알파력’ 짱짱한 ‘BTG’와 ‘그라운드워크’를 접하고도 계속 ‘아이 두 미’를 찾았다. 그러나 흥미로운 놀이와 체험을 통해 입체적으로 그룹을 이해한 팬들은 키키의 착한 앤섬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뮤직비디오 속 그들의 청춘이 비록 절대다수가 누리지 못하는 서구화된 판타지임은 사실이다. 그런데도 건강하고 해맑은 청춘의 하루를 찬란하게 비추는 화면의 힘이 만만치 않다. 온라인이 평범인 시대에 대자연 속 멤버들은 오프라인을 지향한다. 다른 곡에서는 완전히 인터넷 없이 살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인데, ‘아이 두 미’와 ‘댄싱 얼론’에서는 유독 휴대폰이나 소셜 미디어 등의 요소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 두 노래에는 오직 불완전하지만 당당해지고자 다짐하는 나, 그리고 무엇이든 함께해보고 싶은 너만이 존재한다. “말없이 눈물로 다들 떠나가도 네 편 할게. 너가 왜 미안해. 오히려 너를 꼭 안아줄게.”의 여운이 진하다.
Y2K 리바이벌과 디지털 노스탤지어, 그리고 디지털 디톡스. 키키의 세계는 복잡다단하다. 알파 세대, ‘MZ력’ 등의 단어로 쉽게 구분할 수 있는 세대론이나 젠더론 등의 논의는 잊어도 좋다. 2020년대 한 시대의 상징을 만들고자 위를 보고 걷는 K팝 산업의 한 틈에서 나누는 아기자기한 대화 그 자체에 집중해 보자. 무엇이든 포용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소녀들의 이야기는 우정과 사랑의 경계를 허물어트리고 시간의 흐름을 어지럽게 휘저어 놓는다.
키키가 공식 유튜브 채널에 올린 CD 플레이어, MP3 플레이어, 블랙베리 휴대폰, 무선 이어폰으로 이어지는 ‘댄싱 얼론’의 시대별 리믹스는 상징적이다. 키키가 사는 세상은 마치 인생 시뮬레이션 게임 속 서로 다른 이름으로 저장해놓은 상이한 시나리오처럼 다양하다. 어떤 챕터는 한적한 전원 마을인데 다음 폴더에는 시끌벅적한 대도시가 펼쳐진다.
분명 누군가는 개인이 기억하는 시대의 소리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게 될 테다. 키키는 괜찮다고 말한다. 혼자 춤을 춰도 홀로 꿈꾸는 건 아니니까. 난 그걸 느낄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