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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파란노을, 'After The Magic'

파란노을의 현재는 그 어떤 마법보다 아름답다.

김도헌
김도헌
- 10분 걸림

8/10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에 들떠 있던 시기가 꿈결처럼 느껴진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정규 앨범 12장 분량의 노래를 발표하여 인터넷에 익명으로 투고했으나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던 무명의 아티스트 파란노을은 2021년 밴드캠프(Bandcamp)에 올린 새 앨범이 세계적인 음악 데이터베이스 및 커뮤니티 사이트 레이트유어뮤직(RateYourMusic)의 주목받는 '바람에' 한국 인디 신에 반강제로 데뷔했다. 흰천장을 바라보며 상상했던 2000년대 홍대 앞 웨스트월드는 실제로 그 시대를 경험하고 기억하던 이들에게 감격의 노스탤지어를 선사했고, 자신을 패배자라 고백하면서도 죽지 않는 음악으로 세상에 나서고 싶노라 외치던 아티스트의 외침은 '찐따무직백수모솔아싸병신새끼'들에게 희망을 안겼다. 음악 팬과 관계자들은 파란노을의 정체를 궁금해하며 그의 음악에 여러 해석을 추가해 이야기의 소재로 삼았다.

마법은 거기서 멈췄다. 현실이 찾아왔다. 파란노을은 유통사를 통해 스트리밍 서비스에 자신의 음원을 등록했고, 한 장의 정규앨범을 추가로 발표했다. 2년 전 새 아티스트의 등장에 열광하며 상찬의 언어와 본인의 추억을 아끼지 않던 이들은 파란노을의 이름을 금세 잊었다.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파란노을은 '청춘반란'을 부르짖다 사라져간 수많은 인디 뮤지션 중 한 명이었고, 겪어보지 않고 이해할 생각도 없는 '요즘 20대'를 설명할 때 사용하기 편리한 상징이었다. 파란노을도 '잠깐 좋은 꿈을 꿨다고 그걸 현실처럼 받아들이면 그게 더 비참하지 않겟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대신 그는 좋은 꿈을 바탕으로 주어진 날들을 충실하게 살았다. 디지털 던(Digital Dawn) 페스티벌과 단독 공연에 참여하고, 김민하, 정요한, 이환호, 델라 지르(Della Zyr), 아시안 글로우(Asian Glow), 핀 피오르(Fin Fior) 등의 동료를 얻었다. 동화처럼 낭만적이고, 환상보다 꿈결 같은 순간은 비범한 사건보다 보편의 경험에서 피어올랐다.

'After The Magic'은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황홀하게 허물어트린다. 지난 작품에서 그가 주조한 소리의 파편은 거칠고 날렵하게 아티스트 주위를 회전하며 두터운 방어 기제를 형성했다. 신작에서 그는 노트북 프로그램 속 프리셋에 포함된 드럼과 노이즈, 글리치와 신스 리프를 그대로 가져가되 앨범 전체에 실제 악기 연주와 코러스를 더하며 날 선 태도를 누그러트린다. '독기를 완전히 빼고 이모에 거리를 둬 논란을 원천 봉쇄'하겠다는 심술로부터 출발한 결정이라 해도 그 결과는 너무도 신비롭고 아름답다. 가시 돋친 연약함을 세상에 토로하는 대신, 그렇게 상처받고 고독하게 가라앉은 이들에게 따스한 손을 내미는 작품이다.

다함께의 정서를 이야기하기 위해 가장 먼저 예시로 들 수 있는 곡은 선공개 싱글 '우리는 밤이 되면 빛난다'다. 시규어 로스가 커리어 초기 들려주었던 벅찬 상승의 소리를 간결한 인디 기타 팝과 후반부 스트링 세션으로 옮겨 놓은 듯한 이 노래는 인터넷으로 모집한 전 세계 음악 팬들의 목소리가 코러스로 담겨있다. 어두운 밤하늘을 가득 수놓는 불꽃처럼 선명하게 흩날리는 전자음과 이아직(eeajik)의 기타 연주, 스트링과 코러스의 '끝나지 않았어, 집으로 돌아가자' 반복은 가슴 깊은 곳에 응축되어가는 분노와 좌절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해소의 광경이다. 노래는 가사로도 앨범의 핵심을 자청하는데, 평범한 오늘이 기억에 남지 않고 사라지더라도 함께한 순간만큼은 절대 잊히지 않으며 그것은 노스탤지어라는 이름의 집단적인 경험과 감각으로 영원히 마법처럼 반짝일 것이라는 확신이다.

파란노을의 정서는 혐오가 아니었다. 공격적인 단어와 자조적인 주제 의식이 선입견을 만들어 그의 진심을 왜곡 전시했다. 파란노을은 홀로 음악을 만들었을 뿐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았고 소외되어 꿈만 꾸는 대신 나약한 마음을 과격한 노이즈로 둘러싸 끝없이 세상에 목소리를 전하고자 했다. 나 홀로 음악의 한계와 오랜 무명 생활, 전업에 무게를 둘 수 없는 상황이 단절. 그 제약이 상당수 해결되고 작업물에 대한 확신이 약간의 야심으로 확장된 앨범은 지금까지의 작품 중 가장 유연한 흐름으로 파란노을의 순백을 투사한 마음을 소리로 펼쳐 보인다.

스매싱 펌킨스가 전성기 들려주었던 아름다운 대곡을 연상케 하는 '북극성'은 이아직(eeajik)의 어쿠스틱 연주를 거쳐 초현실적으로 뿅뿅거리는 전자음과 노이즈의 무아지경을 유연하게 연결한다. 앨범에서 가장 긴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도착(Arrival)'은 우아한 건반 연주의 전주와 방황하는 전자 기타와 트럼펫의 비장한 인디 팝 버스, 가녀린 전자음과 거칠게 몰아치는 기타 리프의 폭풍이 무아지경의 뉴트럴 밀크 호텔(Neutral Milk Hotel) 혹은 아케이드 파이어(Arcade Fire)의 잔향과 희망찬 라디오헤드의 대곡을 연상케 한다.

이펙트가 적용된 목소리로 출발하는 일렉트로닉 곡 '스케치북'도 주목할 곡이다. 댄서블한 전자 리듬이 눈에 담고 깊이 각인하고 싶은 풍경을 재빠르게 스케치하는 과정이라면 후반부 섬세한 전자음으로 주조된 환상의 풍경은 파스텔톤의 CG 애니메이션 속 등장하는 희망의 꿈결과 신비로운 마법의 공간이다. 곧바로 몽롱함을 깨는 가벼운 기타 톤의 'Imagination'이 이어지며 델리스파이스, 마이 앤트 메리 등이 견인하던 2000년대 모던 록의 아름다운 낭만을 전하는데 그 구성이 매우 유기적이다. 앨범 후반부의 하이라이트 '개화(Blossom)'은 파란노을이 이번 앨범으로 실험한 일렉트로닉과 DIY 록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다. 연약한 자아가 굉음을 내뿜으며 폭발하며 미지의 공간으로 날아가고자 하는 이 곡은 밴드캠프 시대의 단독 뮤지션이 만든 크라잉넛의 '순이 우주로'다.

파란노을은 훌륭한 팝 아티스트다. 그는 현학적인 언어, 무기력하게 흩어지는 멜로디와 거리를 둔다.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에 대한 상찬에서 자주 볼 수 없었지만, 파란 노을은 그때부터 한 번에 듣고 흥얼거릴 수 있는 멜로디를 중심에 두고 노래를 만들었다. 'After The Magic'에서 파란노을은 쉽게 만들 수 없지만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선율을 곳곳에 심어놓았는데, 이 반짝임은 의도적으로 노이즈를 걷고 밝은 테마를 지향하는 앨범 성향과 진일보한 설계 능력으로 더욱 선명히 빛난다. 메인 싱글 '우리는 밤이 되면 빛난다'의 힘은 물론이고, 다시 한번 스매싱 펌킨스의 이름을 꺼내게 만드는 'Sound Inside Me, Waves Inside You' 같은 곡에서도 섬세한 선율의 힘이 곡의 중심을 굳건히 지탱하고 있다. ​언더그라운드의 슈게이징과 드림팝 아티스트들이 짙은 소리의 안개와 과격한 디지털 방패 아래 저 너머의 세계만을 꿈꾸다 '팝'의 요소를 간과하였다는 점에서, 탁월한 대중성으로 세계 인디 마니아들의 지지를 끌어낸 파란노을의 멜로디 능력은 보다 고평가받아야 한다.

마법이 풀린 후를 노래하는 'After The Magic'은 마법을 거는 작품이다. 앨범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서 깨어나 지독한 숙취를 품고 살아가는 오늘, 길고 긴 어둠의 연속이었던 어제와 지난하고 응답 없는 창작의 과정을 반복하는 내일을 아름다운 매혹의 주문으로 아름답게 꾸민다.

앨범을 듣고 있노라면 자꾸만 바보같은 꿈을 꾸고 싶어진다. 눈물짓고 포기하는 대신,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대신, 이번 생에 이루지 못할 허황한 목표라도 좋으니 있는 힘껏 돌진해보고 싶다. 계속 다짐하고 소리치며 살아가고 싶어진다. 깊은 내면의 힘과 아무렇지 않게 반복되는 일상 속 작은 열망의 불씨, 그리고 곁에 있는 너, 나, 그리고 우리는 척박한 2023년의 대한민국을 그 어떤 마법의 땅보다 비현실적인 생명의 공간으로 테라포밍할 힘을 가지고 있다. 파란노을의 현재는 그 어떤 마법보다 아름답다.

추천곡 : 북극성, 우리는 밤이 되면 빛난다, 스케치북, 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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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 김도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