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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Power Station : Review, Column, Interview, etc

과거로부터 날아온 엽서

연애편지와 엽서로 가득 찬 신발 상자.

김도헌
김도헌
- 11분 걸림

독립 후 10년이 넘었지만, 부모님께서는 본가의 내 방을 정리하지 않으셨다. 가끔 집에 들러서 내 방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광경이 쏟아 넘칠듯한 책장과 차곡차곡 쌓인 CD 전시장이다.

바이닐 세대가 아니었던 나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용돈을 아껴 CD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7~8년을 수집하고, 스무 살 때쯤 선생님의 거대한 컬렉션도 일부 물려받게 됐다. 제법 규모가 있는 조개 패총 같은 CD 컬렉션이지만 안타깝게도 좁은 자취방에 둘 수가 없어 본가에 묵혀두고만 있었다.

내 주위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 중 관련 재화를 수집하지 않는 이는 드물다. 하지만 음악에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서랍장을 빼곡하게 채운 CD는 아무 쓸모 없이 부피만 차지하는 애물단지일 뿐이다. 설상가상으로 바이닐이 수집의 영역을 대체하는 바람에 CD는 더욱 설 자리를 잃었다. 턴테이블은 있어도 CD가 들어가는 오디오 시스템을 갖춘 내 또래 친구들은 흔치 않다.

그렇다고 CD 컬렉션을 함부로 버릴 수도 없는 일. 이사 서비스를 부르고, 빽빽한 집의 꽤 넓은 공간을 희생하고서라도 나의 수집품을 전시할 공간을 마련하고 정리하며 뿌듯해하는 사람들이 우리다.

가디언 오스트레일리아서 근무하는 크리스 스웨일스(Kris Swales)의 칼럼을 번역했다. 원제는 '친구들이 내가 CD를 버리지 않는다고 놀리지만, 나는 과거로부터 날아온 이 엽서들과 헤어질 수 없다(Friends mock me for keeping my CDs, but I can’t bear to part with these postcards from my past)'다.

My friends mock me for keeping my CDs, but I can’t bear to part with these postcards from my past | Kris Swales
Running an eye across my collection is like flicking through a shoebox full of love letters


손님들을 집에 초대해 새로 집에 들여온 CD 컬렉션으로 가득한 방에 들어가자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손님들은 서로를 흘긋 쳐다보며 "아직 CD가 엄청 많네…."라 속삭입니다. "스웨일스, 언제 다 갖다 버릴 거예요?"라고 묻는 사람도 언제나 있습니다.

변명거리는 많습니다. 세기말 DJ 믹스 시리즈들의 대다수는 디지털 호환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자동차의 멀티 디스크 CD 플레이어에 테마별로 CD를 꽂아 넣는 일도 즐겁습니다. 초콜릿 바에서 플라스틱 포장지를 떼 버릴 때도 죄책감을 느끼는 저는 이 모든 반짝이는 CD 디스크와 주얼 케이스를 매립지로 보내버릴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CD는 모두 재활용할 수 있지만, 제가 살고 있는 호주에서는 CD가 재활용이 어렵다는 소식만 들릴 뿐입니다.)

만약 CD가 단순히 음악만 재생하는 재화였다면, 이 수많은 디스크는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모든 불필요한 쓰레기들과 함께 사라졌을 겁니다. 하지만 음악 이상의 무언가가 있습니다. 이 먼지투성이 선반 위에 놓인 컬렉션은 추억의 수집품들입니다.

록 밴드 카이어스(Kyuss)가 '산만하지 않은 상황에서 들어라.'는 라이너 노트를 삽입한 'Welcome to Sky Valley'는 제가 구입한 날부터 가장 좋아하는 앨범이었습니다. 17살 때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밴드만큼 황홀한 음악을 들려주는 존재는 없습니다.

헤비한 슬러지(Sludge) 사운드로 가득한 이 앨범이 지금은 좀 낡게 들리지만, 1994년 7월 1일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퀸즐랜드의 한 영화관에서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영화 '스피드'를 보며 즐겼던 트리플 데이트, 맥도날드 초콜릿 선데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해맑게 웃던 나날들.. 이듬해 'Welcome To Sky Valley' 앨범을 남기고 카이어스가 해체했을 때 저는 2주 후 저는 학교의 피크닉 테이블에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공공장소에서 모든 감정을 털어놓는 순간도 오는 법입니다.

*카이어스는 조시 호미, 브랜트 비요크, 존 가르시아, 닉 올리베리가 1987년 결성한 4인조 밴드다. 스토너 록, 데저트 록 장르의 문을 연 밴드로 평가받는다. 카이어스에서 기타를 치던 조시 호미는 밴드 해체 후 드러머 알프레도 에르난데스를 끌어들여 밴드 퀸스 오브 더 스톤 에이지(Queens of Stone Age)를 결성하며 성공을 거둔다. 다른 멤버들도 푸만추, 드워브스, 몬도 제너레이터 등 스토너 계열 밴드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 역자

CD 컬렉션을 훑어보는 일은 과거 연애편지와 엽서로 가득 찬 신발 상자를 열어보는 것 같습니다. 아주 신나는 순간들과 영혼을 짓누르는 듯한 최악의 기억, 그리고 힘들고 단조롭게 살아가던 기억의 부스러기들이 등장합니다.

DJ 키드 케노비(Kid Kenobi)가 엄선한 2002년 작 'Clubbers Guide to Breaks'는 주 50시간 이상 일하고 금요일 밤마다 호주 브리즈번의 유명한 브레이크비트 클럽 엠파이어 호텔 문 바(Empire Hotel Moon Bar)를 찾아 비쩍 마른 몸을 흔들던 25살의 제가 담겨있습니다. 모든 곡이 새로운 시작처럼 들리는 세 DJ의 디스크 믹스 앨범, SOS의 'Balance 013'은 마이애미에서 9년 동안 마약에 취해있던 순간을 떠오르게 합니다. 케이티 페리의 'Teenage Dream'이 3년 후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20년 전 사귀던 여자친구가 선물해준 플레이밍 립스의 'Zaireeka' 앨범은 어제 산 듯 새것입니다. CD 네 장을 동시에 틀어야 하는 아이디어는 이론 속에서 더 아름답다는 교훈을 남겨주지요.

* 플레이밍 립스의 1997년 앨범 'Zaireeka'는 반드시 CD 네 장을 동시에 재생해야 감상할 수 있는 독특한 콘셉트의 앨범이다. 난해한 구성으로 발매 당시 피치포크(Pitchfork) 매거진은 이 앨범에 0점을 매겼다. - 역자

2022년으로 돌아와 볼까요. 제가 선정한 올해의 앨범은 샤를로트 아디제리(Charlotte Adigéry)와 볼리스 푸풀(Bolis Pupul)이 발표한 'Topical Dancer'입니다. 다채로운 형태와 볼륨, 템포를 자랑하는 댄스플로어의 전복적인 컬렉션이죠.

스트리밍 서비스로 음악을 들을 때 어떤 노래를 듣고 있었는지, 어떤 기억이 떠오르는지는 묻지 마세요. 사무실로 20분 출근하는 것에 대해 노스탤지어를 느낄 수는 없습니다. 덜 익은 아보카도로 과카몰리를 만드는 순간을 추억으로 남길 수는 없잖아요. 음악 감상은 몰입의 경험이어야 합니다. 스트리밍은 대부분 당신이 다른 일을 하며 음악을 들을 때 사용하는 서비스입니다.

은근히 눈치를 주는 제 친구들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제 CD 컬렉션이 줄어가고 있다는 점이죠. 제게 더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작품을 중고 거래하거나 자선 단체에 기부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CD장을 관리하는 과정은 마치 물과 바람이 협곡을 깎듯 부드러운 침식의 단계를 거칩니다. 컬렉션이 완벽한 형태를 찾을 때까지요.

그 결과로 중심에 남은 음악 스타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강력하게 때리는(crush-bang-wallo) 드럼 인트로, 사막을 질주하는 스팀 롤러 차량처럼 드넓은 수평선 위에 출렁이는 기타 리프, 눈을 감고 몸을 휘저으며 모든 게 다 괜찮을 거라 위안하게 되는 AABA 구성의 빌드업과 드롭입니다.

불가피하게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거나 폐기되기 전까지 저의 CD장은 - 바로 옆 방에 무기고처럼 쌓여가는 CD와 새로운 추억들까지 포함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인도 벵갈루루 골동품점에서 구입한 나지아 하산(Nazia Hassan)의 'Disco Deewane') 앨범처럼요. - 제 손상된 뇌보다 제 삶과 그 이야기를 훨씬 더 잘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오기 전에, 아마도 세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차에 CD 플레이어를 달고 우리만의 주차장에 모일 거예요. 'Zaireeka' 앨범에도 기억에 남는 순간을 마련해줘야 하거든요.

30대는 왜 음악을 포기하는가
20대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날이 갈수록 더 많은 친구들이 우리가 한때 공유했던 열정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너무 성급한 생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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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 김도헌입니다.